퇴사 후 한동안, “지금 뭐 하고 있어?”라는 질문이 가장 어렵고 버거운 말이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다고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자주 흔들렸습니다. 이 글은 그런 질문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마음의 자세와, 정체성을 다시 세워가는 과정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움츠러들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웃으며 물었습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아무런 악의도 없었고, 그저 안부를 묻는 평범한 대화였지만, 나는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입을 열기 전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프리랜서라고 할까?’, ‘아니면 준비 중이라고 얼버무릴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질문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회사 다녀요.”라는 단순한 한마디로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었고, 그 말은 나를 명확한 사회적 틀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회사원이 아니고, 명확한 직함도, 보여줄 만한 결과물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다. 정작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나름의 루틴을 지키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타인의 기준’에 맞춰 설명하기 어려운 삶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삶의 밀도가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들리는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라,“넌 지금 잘 살고 있니?”는 묵직한 평가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던 시기, 나는 점점 사람을 피하게 되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를 변명하는 마음의 준비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의 가장 솔직한 감각이었습니다.
설명 대신, 나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처음엔 나를 더 똑똑하게 포장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창작을 위한 휴식기예요.”“이직 준비 중인데,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어요.”“프리랜서로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말을 포장해도 내 안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타인을 안심시키기 위한 설명이지, 나를 위한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설명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나는 나름대로 하루를 충실히 살고 있고, 그 자체가 이미 내 정체성일지도 몰라.’
그때부터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인정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더 불안하고 모호하지만, 나는 매일 글을 쓰고, 나를 돌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여러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삶은 성과로 측정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의미가 쌓여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누가 아니라 내가 먼저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요즘 뭐 해?”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나다운 삶을 찾는 중이에요.”“하고 싶은 걸 천천히 해보고 있어요.”“구체적이진 않지만, 제 삶을 제가 설계해 보는 중이에요.” 설명이 부족해 보여도 괜찮았습니다. 내가 내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 질문은 더 이상 나를 흔들 수 없었습니다.
흔들림은 약함이 아니라 변화의 신호
지금도 여전히 가끔은 “이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질문은 여전히 나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흔들림을 단순히 ‘약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의 증거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는 내가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설명하던 방식들이 더 이상 맞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의미를 찾는 중이라는 뜻이니까요. 예전에는 직업, 타이틀, 수입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나를 설명해 주었지만, 지금의 나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곧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습니다. 그 삶은 때로는 더디고 모호하고 불안하지만, 그 안에 분명 나만의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제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 나를 평가하거나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중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있는 지금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지금 뭐 하고 있어?”라는 질문이 두려웠던 시간은, 결국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말이었고, 그에 대한 답은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완벽한 답을 내리진 못하지만,이제는 질문에 흔들리는 대신, 나를 더 다정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