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 명함도 직함도 없는 ‘나’로서의 시간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벗어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잘하는 사람일까? 이 글은 그 물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스스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직장을 그만두자, 나는 '무엇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퇴사를 하기 전까지, 나는 늘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습니다. 회사 이름, 팀 이름, 직무, 맡은 프로젝트.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직함은 나의 일상이었고, 동시에 나의 정체성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그 질문이 막막하게 다가왔습니다.
“요즘 뭐해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쉰다’고 하자니 너무 무의미하게 들리고, ‘생각 중이다’라고 하자니 나태해 보일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나를 정의해 왔지, ‘내가 어떤 사람인가’로는 스스로를 설명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요.
직장을 떠난 순간, 나는 갑자기 텅 빈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잘하던 업무가 있었고, 조직에서 나름의 역할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니 내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공허함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갔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과연 뭘 잘하는 사람일까?"
아무것도 안 해본 내가, 나를 알아가기까지
퇴사 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하나씩 시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써보기도 했고,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그림도 그려봤습니다. 처음엔 결과보다는 그저 시도해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이걸로 뭔가 성과를 낼 수 있을까?”라는 조급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무엇을 잘하는 사람’으로 정의해야만 안심이 되는 그 마음. 사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오래도록 길들여진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성과, 수익, 인정… 내가 잘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그 버릇이, 퇴사 이후에도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잘하는 것을 찾는다는 것이 꼭 '눈에 보이는 결과’로 증명되는 능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깊은 공감으로 반응한다는 것,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해본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능력이고, 내 안의 자산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이제는 “이건 내가 못해서 안 하는 거야”가 아니라 “이건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해볼 수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퇴사는 나에게 정체성을 잃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아를 탐색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회사 밖의 나는 그저 ‘직원이 아닌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처음부터 다시 살아보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이 아닌 나, 그 위에서 다시 쌓는 정체성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제 조금씩 내 안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글로 마음을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퇴사 전까지는 ‘성과’로 측정되지 않았던 자질들이지만, 퇴사 이후 오히려 더 소중하게 다가온 자산들이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누군가 “지금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잠깐 멈칫하게 됩니다. 여전히 내 삶에 ‘타이틀’이 없다는 건 가끔 불안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더 단단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나를 알아가는 중이에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조용히 실험하고 있어요.”
이런 말들이 어색하지 않게 입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느낍니다.
지금의 나는 회사원이 아니지만, 나만의 루틴을 갖고 있고,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내면의 변화를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숫자로 평가받지는 않지만,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서서히 쌓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퇴사 이후의 나는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 스스로의 기준으로 정체성을 다시 세워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뭘 잘하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질문 앞에서 초조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계속 알아가는 중이며, 그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라는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아닌 나, 결과가 아닌 나, 과정 위에 서 있는 나. 그 존재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퇴사 후 내가 찾은 가장 소중한 정체성입니다.